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를 만드는 것이란 영화제에 가는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는 것이고, 비 속에서 촬영하는 것이고, 무거운 조명기를 드는 것이다."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인터뷰 중)
멋진 말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 일 만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가 말했던 저 한 문장이 지금 나에게는 뼈에 사묻히는 말이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나에게 어떻게 보면 참 특별하다. 그리고 특별한 것에 비해 그의 영화를 잘 모른다는 점에서 한 번 더 특별하다.
20살 때, 영화를 배우겠다고 찾아간 충무로 한 편 영화교육센터에 OT에서 있던 일이었다.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라고는 '이와이 슌지' 밖에 없었던 나에게 그 날 밤 술자리에서의 학생들이 나눈 대화는 다소 충격적 이었다.
나와 동갑인, 즉 고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온 친구 둘이 있었다. 제휘와 시우인데 이 둘은 나에 비하면 꽤나 시네필 이었다.
선배 기수들과 대화에서 여러 발음하기도 힘든 감독들의 영화를 이야기하며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제휘가 어느 선배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싸웠다는 것이다. 물론 말싸움이다.
나한테 이일은 적잖이 충격적 이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러 거장들의 영화를 얼마나 많이 보았고 사랑했으면 OT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싸우기까지 할까...
그 이후로 나는 그 감독의 이름이 뇌리에 박혀있었고, 무언가 거장들의 영화를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를 2시간 거리의 영상자료원 출근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도중, 드디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가 자료원에서 상영되었다.
'블루 레드 화이트' 3가지색 특별전이었고 오전부터 하루 종일 3편이 연속 상영 되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 대중교통을 타고 허겁지겁 달려 갔었다. 처음 상영작이 블루 였는데 정시 입장이 원칙인 자료원에 나는 5분을 지각하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거장의 연작을 보고 느낄 깨달음을 놓치게 될까 봐, 나아가 그 날이 어쩌면 내게 상당히 중요한 터닝포인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당히 조급해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문이 닫힌 상영관 앞에서 나는 자료원 직원 분에게 엄청난 키에슬로프스키의 광팬인 척 입장시켜달라고 사정하였다,
다행히 직원 분은 나를 입장시켜주셨고, 나는 무사히 하루 종일 3편의 연작을 보고 나왔다. 물론 중간에 한솥 치킨마요로 끼니를 때우면서..
하지만 정작 이 세 편의 영화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던 순간에도 재밌다기 보다는 뭔가 공부 하려는 의지로 간신히 졸지 않았던 것 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 영화를 공부하고 찍고 있으며 어느 곳 그리고 누군가 에게는 단편감독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OT 때, 나에게 불안감을 주었던 제휘와 시우는 영화를 그만두고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면서 굳이 저 순간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그가 말한 위에 저 한 문장 때문이다.
20살 때, 혹은 영화를 배우기 시작할 때 저 문장을 읽었던 감상과 지금의 감상 사이에 간극말이다.
어쩌면 이를 배우려고 내가 8년간 영화를 배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 영화를 배우며 느낀 것은 정말 힘들고 고된 일인 것은 당연하거니와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외로움'이다.
온전히 내가 써내고 담아내고 나아가 세상에 내보내야 할 것들을 홀로 감당해야하는 외로움.
많은 사람들의 작업들 이전에 항상 내가 혼자 버텨내야할 시간들이 있고, 그것은 꽤나 길다. 그리고 외롭다.
이것은 단순히 내게 일상을 나눌 연인이 없거나, 맥주 한 잔 할 친구들이 없다는 뜻에서의 외로움이 아니다.
다분히 필연적인, 받아들여야만 하는 외로움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말한 저 필름 메이킹이 나에게는 지금 '외로움'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맞서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화제를 가는 것 혹은 폼을 잡고 감독인터뷰를 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니라
그저 매일 책상에 앉아 글을 끄적이고, 아이디어를 적고, 비오는 날에는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뛰어다녀야 하는 것 일 것이다.
이 하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8년이란 시간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돈이 없던 내게 유일한 기회였던 제작지원을 받기 위해 앉아있던 시간들, 그리고 혼자 밤늦게 집으로 걸어가던 날들.
그렇게 만든 첫 단편은 다행히도 부산에 갔으며, 홍콩에서 내게 상과 상금을 가져다 주었다.
이어서 두 번째 단편 또한 전주에 가고, 이제 관객들을 만나기 시작하려 한다.
나름 빠른 시간에 얻은 성과지만,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재수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건 내게 남은 것은 위에 말했던 저 하나의 깨달음 뿐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진심이며 진실이다.
이제는 다시 지나온 시간과 같이 앞으로의 8년을 보고 '외로움'에 맞서 버텨야 할 것이다.
장편영화 혹은 상업영화. 이 길에 있어서 나는 20살 때의 나와 같다. 하나도 모르겠고 조급함과 부담감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다시 뛰어다니고,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럼에도 별 다른 성과 없이 돌아오는 날들의 반복일 것이다.
그리고 8년 뒤, 내가 다시 이 글을 돌이켜본다면 많은 것은 아닐지라도 딱 키에슬로프스키의 말에 대한 이해 정도만 바라고 싶다.
이번 주말에는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 레드 화이트를 다시 봐야겠다.